유리솜의 진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물가물하고 뜨문뜨문 몇 장면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집에서 밥을 하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땠었고 나무와 마른 솔잎을 긁어 오려 근처 작은 동산에 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새로 지은 집에서 연탄보일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몇 년이 지나 다시 석유보일러로 교체했던 것 같다. 우리 집 말고 동네 다른 집들도 보일러를 교체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동네 공터 한 구석에는 낡은 연탄보일러 뭉치가 놓여 있곤 했다.
낡은 연탄보일러 뭉치에 올라서서 이런 저런 장난을 치다보면 삭아서 얇아진 겉통이 부서지면서 속의 내용물이 삐져나왔다. 호기심에 겉 철판을 벗겨내니 노란 솜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 게 보였다. 노란 솜은 특이하게도 불에 잘 타지 않았는데 아무튼 불에 타지 않는 특별한 유리솜이라고 하여 서로 그 솜을 가져가려 난리를 쳐댔다. 심지어는 그 솜을 얻으려고 무슨 보물이라도 찾아 나서듯 다른 먼 동네까지 돌아다니기도 했다. 집 근처 작은 동산에는 우리들만의 아지트가 있었는데 나무 가지와 나무 박스 쪼가리로 만든 엉성한 오두막이었다. 모아 진 유리솜을 그곳에 가져가 바닥에 깔고 동네 아이들과 뒹굴고 씨름하며 정말로 귀중한 것을 얻은 듯 마냥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놀고 나면 저녁에 잠을 자려할 때 이상하게도 온 몸이 따끔 거렸고 너무 가려워 참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낮에 놀던 솜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고 무엇을 잘못 먹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었다. 며칠 뒤 우리의 오두막에 깔려 있던 그 유리솜을 모르는 누군가가 가져가 버렸다.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치워버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흔적도 없이 없어져 버렸다. 다른 동네 아이들이 훔쳐간 것이라고 흥분하기도 하고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탈한 마음이 한동안 지속되었었다.
그 유리솜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였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후회되는 일이었지만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또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다.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는 그 때의 유리섬유 조각들이 세포 곳곳에 혹은 혈관을 타고 들어와 심장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지 않을 까하는 우려가 든다. 무지 때문에 미래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도 모르고 마냥 좋아하고 또 그것이 없어졌다고 그렇게 서러워했으니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너무나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대상의 본질을 잘못 알아 고통을 당하는 것은 비단 유리솜과 같은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 생겨날 괴로움을 알지 못한 채 감각적 즐거움이라는 무형의 유리솜 위에 마냥 뒹굴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유리솜에 대한 집착은 철이 들고 또 환경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대상의 성품을 여실지견하는 지혜로써 가능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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