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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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한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살다보니 마음의 고향이 어디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다. 가서 편안하고 즐거우면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고, 그러면 그 순간 그곳이 곧 마음의 고향이 되곤 한다. 강의차 가는 길에 태어나 자란 마을을 가게 되었다. 지금도 속가 어머님과 형님이 살고 계신 곳이기도 하다. 가끔 그냥 잠시 들렀다 다음 일정에 바빠 지나칠 뿐 시간을 가지고 머물지는 못하였다. 모처럼 일정의 여유가 생기자 갑자기 어렸을 적 뛰어놀던 흔적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마음의 상념만을 늘어나게 할 뿐 별 쓸데없는 짓거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요즘 걷는 것이 유행이 된 탓이라 그런지 왠지 오래 걷고 싶어졌다.
어렸을 적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잘 돌아다녔기 때문에 행동반경이 생각보다 넓었고 그래서 골고루 다 가보려니 상당히 먼 거리가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어차피 올레길이나 무슨 둘레길도 며칠 걸어야 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그런 길에 비하면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냥 아침부터 각각의 방향을 정해 둘러보기로 작정하였다. 예상대로 살았던 동네는 그 동안 몇 차례의 큰 변화를 겪었고 그러면서 어렸을 적 활동했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를 않았다.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곳에 가면 예전 그곳에 무슨 건물이 있었고 거기에 누가 살았으며 그 사람들과 있었던 여러 장면들의 해프닝이 모락모락 떠올라 절로 웃음과 그리움이 베어 나오게 만들었다.
추억의 순례길에서 첫 방문지는 초등학교, 요즘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다. 자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긴 한데 건물은 리모델링이 되었고 새로운 많은 건물들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놀랐던 것은 운동장의 크기가 너무 작아 보이는 것이다. 어렸을 적 달려도 달려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학교 운동장은 큰 절 마당보다도 적게 느껴지고 그냥 아기자기하게 보일 뿐이었다. 운동장이 작아진 건지 눈이 달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당의 흙은 예전의 그 흙 그대로 이지 않았나 싶어 손으로 흙을 쓸어 모아 보았다. 그러면서 주마등처럼 그 흙 위에서 뛰고 뒹굴던 장면들이 마치 며칠 전의 일인냥 살며시 흘러 지나간다.
흙을 움켜쥐고 잠시 추억 명상에 잠겼다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운동장 한 구석에 놀이기구 몇 점이 줄지어 있었는데 왠지 낯익은 모습들이었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이번에는 흐뭇한 웃음이 묻어나온다. 바로 내가 어렸을 적 뛰어놀던 그 놀이기구 그대로였다. 수차례 페인트 덫칠을 해서 원래의 파이프 굵기보다 칠해져 있는 페인트 막이 더 굵어 보일 정도였다. 예산이 없어서 그냥 나둔건지 아니면 워낙 튼튼하게 잘 만들어서 수명이 긴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뜻밖의 조우를 하게 되어 무지 반가웠다. 놀이기구 하나하나를 만져볼 때마다 생각나는 장면들이 열심히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다. 팔이 부러진 친구, 머리가 터진 친구,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의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중간에 아주 허름한 모습으로 시소가 놓여있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저학년이었을 때였다. 친구들과 같이 양쪽에 죽 걸터 앉아 서로 누구를 좋아하는지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놓고 놀리기도 했던 장면들, 한 친구가 벌떡 일어나 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모든 친구들이 다 나자빠져 버린 일들이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시소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 뒤쪽으로 가보았다. 점심 시간 신나게 놀고 나면 우루루 몰려가 수도 꼭지에 입을 대고 새끼 젖소가 젓을 빨 듯 맛있게 먹었던 물맛이 그리워졌다. 안타깝게도 이런 저런 크고 작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예전의 수돗가는 보이지 않았다.
뒤쪽 구석으로는 재래식 화장실과 쓰레기 소각장이 있었다. 친구가 큰 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가면 다른 친구들은 화장실 뒤쪽 덮개를 열어 돌멩이를 던져 넣었던 일도 떠올랐다. 똥물이 크게 튀어 올라 멀리서도 비명과 욕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면서 우리들은 하늘이 떠나갈 듯 웃었던 기억이 난다. 쓰레기 소각장에서는 쓰레기를 태우다 말고 어른들 흉내 낸다고 종이를 말아 피우다 선생님한테 걸려 귀를 잡혀 교무실에 끌려갔던 적도 있었고, 통학 시간을 단축해 보겠다고 울타리 중간 개구멍 통해 빠져 다닌 일들도 기억되었다. 그놈의 울타리는 막아도 막아도 여기저기 계속해서 만들어 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작은 문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학교 순례를 마치고 딱지와 구슬치기 장소였던 동네에서 가장 긴 담벼락을 찾아보았다. 이미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얼마를 더 걸어가니 같은 담벼락은 아니었지만 모양이 비슷한 담을 발견하였다. 상당히 많이 기울어 거의 쓰러지기 직적인 것 같은데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예전 모습 그대로 였다. 밝은 회색 시멘트 기둥이 중간 중간 서있고 그 사이에 다시 널빤지 모양의 시멘트 판이 끼워져 서있는 담이었다. 요즘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담인데 이왕이면 헐지 말고 그대로 잘 보존했으면 하는 심정이 들었다. 나처럼 고향이라는 곳에 왔을 때 무언가 옛 추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기념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참을 걷다 보니 학교에서 소풍갈 때 걷는 루트를 따라 걷고 있었다. 아마도 소풍갔던 곳이나 관련된 많은 장면들을 떠올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길은 예전과 거의 비슷했지만 길가의 건물들은 대부분 새로 지어진 것들이었고 그 건물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죄다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오전 내내 걷다보니 허기가 느껴졌다. 예전 정말로 어쩌다 한 번 아버님 손에 이끌려 왔던 중국집을 찾아보았다. 비슷한 자리에 중국집은 있는데 이름은 예전의 그 이름이 아니었다. 자장면과 돼지 껍데기를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맛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가 보다. 옛날 그 중국집에 배달하는 형이 있었는데 우연히 배달하다 교통사고 나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생각할수록 몸서리 쳐진다.
크게 한 반퀴를 도니 거의 이십리길을 걸은 것 같다. 다시 출발한 곳을 향해 걷고 있는데 아픈 기억이 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친구들과 시내에 있는 수영장을 가려고 급히 서둘러 골목길을 뛰어 나가다가 때마침 지나치던 택시에 부딪혀 날아가 떨어진 일이 떠올랐다. 둥 떠서 저만치 날아가 떨어졌는데 그 순간 병원을 가야 될지 모른다는 무서움 때문에 정신없이 일어나 도망친 기억도 났다. 저녁에 택시기사가 동네를 수소문해 집에 찾아왔는데 한사코 병원에 안 가겠다고 버텨 두 달을 집에서 물파스와 아끼정끼?(빨간약)만 바르면서 고생한 적도 있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또 다른 아픈 기억이 난다. 동네에 3층 짜리 건물이 생겨 제 2의 놀이터로 활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난간에 빨간색 플라스틱 호스더미가 있었고 친구들과 그 호스를 밧줄 삼아 붙잡고 3층 난간에서 아래로 무슨 특공대원들처럼 내려가려고 하였다. 내가 제일 처음 순서였는데 나는 난간에서 호스를 붙잡고 아래로 내려갈 참이었고 친구들은 나머지 호스를 꽉 붙잡고 있었다. 난간 끝에 매달려 막 호스를 붙잡는 순간 그 플라스틱 호스는 맥없고 툭 끊어지고 말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순간 툭 떨어진 것 같은데 정작 떨어지고 있는 나는 그 짧은 시간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부모님이 걱정하실텐테, 또 죽지않고 다치기만하면 엄청 혼날텐테, 이런 저런 별 생각을 하던 중에 시멘트 바닥에 탕 부딪혔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사지는 멀쩡히 움직이고 어디 피가 나는데도 없었다. 한 가지 숨이 잘 안 쉬어지고 숨 쉴 때마다 옆구리가 심하게 아픈 것 말고는. 아무래도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다는 친구들의 진단을 뒤로 한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짓고 조용히 집에 들어가 또 두어 달 끙끙 알았다. 지금 같았으면 난리가 나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는데 그 때는 그냥 그렇게 넘아가서 시간을 보내면 신기하게도 다 나았다.
어느 덧 추억의 순례길도 종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 해는 저물어 가고 있고 안 걷다 걸어서 그런지 다리는 물집이 생긴 듯 하였다. 아직 가보아야 할 곳을 많이 남아 있지만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오늘은 그 정도로 순례길을 끝내기로 하였다. 짧은 하루였지만 정말로 많은 생각들이 찾아왔다 사라졌다. 생각들은 찾아왔다 떠났지만 왠지 나의 마음은 추억의 치유를 받은 느낌이었다. 순수한 마음을 되찾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도 생각하게 하고, 그리고 삶이 라는 것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실감나게 설법해주었다. 요즘 걷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멀리 갈 것이 아니라 한 번 자신의 고향 마을을 찾아가 추억의 흔적을 만나보는 것이 어떤가 추천하고 싶다. 그 어떤 성스러운 순례길 보다도 못지 않은 너무나도 가슴 따뜻한 순례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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