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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진 (사)백운명차문화원 이사장 |
사방은 시공을 초월한 듯 고요했다. 좁은 방에는 나즈막하게 주페의 <시인과 농부 서곡>이 흘렀다. 새벽이면 스님이 낭랑한 목소리로 출가자들의 청규집 <緇門警訓>을 읽었다.
이내 반야봉에 비친 아침 햇살이 천천히 앞마당에 내려앉았다. 아침공양이 끝나면 스님은 어제처럼 음악을 들려주며 묵묵히 차를 내주셨다. 그때 그 오묘한 차향은 이후 내 삶에 깊게 배어 오늘에 이르렀다.
사유가 얕고 정리가 덜 된 이십대였기에 걸음걸음마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나를 몹시 힘들게했다. 나는 수십 명이 함께 수행하는 선방으로 출가했다. 처음으로 토굴 수행처에서 보낸 3일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스님은 틈나는 대로 먹을 갈아 종이에 바둑판 모양만 그리고 있었다. 순간 ‘맞아 맞아, 저렇게 단순하게 반복되는 한결같은 일상이 수행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묵언정진하는 스님을 지켜보며 그동안 쫓기듯 살아온 나를 뒤돌아 볼 수 있었다. 3일을 묵고 하직인사를 하자 스님이 차 생활을 가까이 하라며 다기 세트를 주셨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정진하면서도 다기는 차향만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간직했다. 때로는 차를 구할 형편이 안 되어 반년 넘도록 찻잔에 물만 마시기도 했다.
그 후에도 짬나는 대로 두부 한 모에 콩나물 한 봉지 사들고 그 토굴을 들락거리며 차향을 가득 머금고 내려오곤 했다. 굽이굽이 계절마다 무슨 꽃이 피는지 눈감고도 훤한 그 모퉁이길...어느 날 스님이 차를 우려내며 한 말씀은 법문으로 깊게 남아 있다.“ 살다가 눈물 나는 일이 생기면 하늘을 보라.
애창곡 두어곡 만들어 힘들 때마다 실컷 불러라!”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살아오면서 그 말은 그냥 단순한 말이 아니었던 것을 새삼 느낀다.
당시에는 차를 즐겨 마시는 스님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유독 차를 가까이 하는 스님과의 인연 덕분에 나는 일찍 차 문화에 눈을 떴고 차를 연구하고 만드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사단법인백운명차문화원을 만들고 운영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닌 셈이다. 내 삶에 차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내게 있어서 차는 고독한 수행 길을 덜 외롭게 만들어준 도반이자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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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계엄군이 사찰까지 장악하던 때이다. 나는 가혹한 사회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뒤로 하고 산사에 묻혀 알 수 없는 아픔을 차향으로 달래고 있었다. 어느 날 허벅지까지 찬 눈길을 헤치고 산을 내려간 일이 있다. 그때 도반들과 함께 양희은의 ‘ 하얀 목련’을 목청껏 불렀다.
삼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평소에 그림을 배우거나 그린 바가 전혀 없었던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무심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교롭게 나의 첫 그림은 달밤에 핀 하얀 목련이었다. 이후 틈나는 대로 그린 내 작품은 대부분 차와 자연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내 안에 잠자던 예술 본능을 깨워준 일등공신은 차향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나의 차생활은 35년이 흘렀다.
작년에 문득 낮선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하안거 선방에서 차맛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서... 그런데 우연일까? 그 스님 처소가 다름 아닌 35년 전 처음으로 차를 마셨던 그 토굴이었다.
묘한 인연이다. 스님은 해마다 동티벳 수미산을 다녀온다고 했다. 벌써 그 사이에 서너 번을 다녀왔는데 그럴 때마다 내게 차를 구해다준다. 그 귀한 노반장 보이차를, 때로는 설산의 여린 잎으로 만든‘ 설죽난향’을 들고 왔다. 지리산 성삼재 아래 자리한 상선암, 그곳은 나에게 특별한 성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35년간의 차 생활이 어제와 같고 차 향기 그대로인데 첫 찻 자리 앉았던 옛사람인 나는 어디로 떠나가고 있는가. <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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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산중한담 > 법진스님의 유유자적 山처럼 江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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