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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3-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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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설명한 '깨어있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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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 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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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명상은 이런 것이다.
명상이란 단어이다. 여러 사람이 이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쓴다. 이것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로 단어를 쓰고 있는지 정확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지구 모든 문명들이 명상이라 부르는 관습을 만들었다. 얼마나 포괄적인 정의를 두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아프리카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에스키모까지 모두 다 명상한다. 방법들은 무척 다른데, 그것들을 조사해 보려 하진 않겠다. 이것을 위한 다른 책들이 많이 있다. 이 책의 목표를 위해서 서양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들을 의논하겠다.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 전통 속에 기도와 숙고(contemplation) 라는 겹쳐지는 관습이 있다. 기도란 영적인 존재에게 직접 이야기 하는 것이다. 숙고란 어떤 대체로 종교적인 아이디어나 성경의 내용의 특정한 토픽을 놓고 긴 시간 동안 의식하는 것이다. 정신 수양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행위가 모두 집중력 수행이다. 통상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의 일어남을 제지하고 마음을 하나의 의도적인 지점으로 모은다. 결과는 깊은 고요함, 정식적으로 느껴지는 물질대사(metabolism), 웰-빙(well-being)적 평온함이다.
힌두(Hindu) 전통에서 나온 요가 명상도 진정한 집중 수행이다. 전통적인 기본 수행법은 돌, 촛불, 음절 등 어떠한 물질에 정신을 꼼짝 못하도록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런 기본 방법을 터득한 후 요기(yogi)들은 수행 염불이나 색깔이 찬란한 종교적 이미지나, 몸속의 에너지 채널 등 더 복잡한 물질들로 대상을 옮긴다. 아무리 복잡한 대상이라도 명상 자체는 순수한 집중의 연습이다.
불교 전통도 명상을 매우 중요시 한다. 하지만 새로운 요소가 더해지며, 그것을 더 중요시 한다. 그 요소는 깨어 있음이다. 모든 불교 수행은 집중력을 기구 삼아 깨어있음을 키우는데 목표를 둔다. 불교 전통은 매우 폭 넓기에 이 목표를 향한 방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선(Zen) 은 두 가지 방법을 쓴다. 순수한 의지력을 바탕으로 깨어 있음으로 뛰어드는 첫 번째 방법이 있다. 그저 앉아서 앉아만 있는 것이다. 앉아있음에 집중하는 것 말고는 모든 의식을 버리는 것이다. 매우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짧은 시도만을 통해서도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방법은 린자이(Rinzai)식으로 정신을 깨어 있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풀 수 없는, 하지만 풀어야만 하는 화두를 줌으로써 끔찍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 고통 속에서 도망칠 수 없기에 그 순간들을 순수하게 경험하는 것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다른 아무것으로 도피 할 수 없다. 선(Zen)은 고달프다.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이지만 매우 참혹하기도 하다.
또 하나, 탄트릭(Tantric)불교는 거의 거꾸로 이다. 우리가 통상 하는 의식적 생각은 자아의 형상화(manifestation)이다. 당신이 자아로 여기는 아상이다. 의식은 자아라는 개념과 아주 밀접하다고 생각한다. 자아라는 개념은 순수한 깨어있음의 흐름에 가시적으로 덧붙여진 반응과 정신적 이미지들의 모임이다. 탄트라는 이런 자아의 이미지 들을 파괴시킴으로써 순결한 깨어있음을 찾기를 추구한다. 표상화(visualization)란 방법이 있다. 수행자에게 특정 수행할 이미지를 준다. 예를 들어 탄트릭 신전 중 한 신의 이미지를 준다. 수행자는 완벽한 명상을 통해 그 이미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자기의 주체성(identity)을 벗어나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능한 일이다. 이 과정 중 그는 자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며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본인의 자아든, 다른 무엇의 아상이던, 또는 자아가 없음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결과는 순수한 깨어 있음이다.
위빠사나는 가장 오래된 불교 명상법이다. Sattipatthana Sutta 란 부처님 스스로 말씀하신 내용의 논설이다. 위빠사나는 서서히 정념(mindfulness)이나 깨어있음을 키우는 것이다. 수년을 걸쳐 한 단계 한 단계씩 진행 시키는 것이다. 수행자는 본인 존재의 특정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관찰하도록 정신을 모은다. 점차적으로 존재의 흐름을 더욱더 많이 인지 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위빠사나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매우 빈틈없기도 하다. 고대시대의 체계적으로 감수성을 훈련하는, 자신의 수용력을 점차적으로 풍부히 하는 주의 깊은 귀 기울임, 완벽한 통찰력, 그리고 조심스러운 실험이다. 예리하게 냄새 맡고, 완전히 느끼고, 진정으로 주의 깊게 느낌을 조사한다.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생각들을 듣게 된다.
위빠사나의 목적은 집중력을 배우는데 있다. 우린 이미 이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망상일 뿐. 현실은 너무나 많은 생활 속의 경험들에게 최소로 필요한 만큼 신경을 써주는 상황이여서 마치 잠을 자고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다. 현실에 집중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도 못 알아채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곤경이다.
깨어있음을 통해 우리는 서서히 자아라는 이미지 밑에 깔려있는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단순히 좋고 싫고, 행복하고 슬프고 한 것이 아니다. 이럴 것들은 망상일 뿐. 진정으로 들여다본다면 인생엔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질감이 있다.
위빠사나는 세상을 완전히 다른 관념에서 보는 정신적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처음으로 속에서 어떤 일을 격고 있는지,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본인의 경험을 체험하는 와중 그 상태를 관찰하는 참여적 연구다. 이 관습은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접근해야한다.
“이미 배운 것엔 신경 쓰지 마라. 판례나 편견들은 잊어버려라. 난 인생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고 싶다. 난 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질 알고 싶다. 난 삶의 가장 깊은 속성을 알고 싶다. 다른 사람의 설명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다. 내 스스로가 경험하고 싶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명상에 임하면 당신은 성공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사실그대로- 시시각각으로 흐르며 변하고 있다고-보고 있을 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삶은 설명 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옥해 질 것이다. 이것은 경험 해보아야 한다.]
Pali어로 지혜명상은 Vipassana Bhavana라 한다. \'Bhavana\'는 Bhu라는 ‘자라다’, ‘~으로 되다’라는 어원에서 온다. 그러므로 Bhavana는 ‘계발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며 항상 마음을 상대로 쓰인다. ‘Bhavana’는 정신적 개발이다. 위빠사나는 그 어원으로부터 나왔다. ‘Passana\'는 ’보다‘ ’인식/지각하다‘라는 뜻이다. \'Vi\'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한 접두사이다. 기본적으론 ’특별한 방법으로’란 뜻이다. 또한 ‘속으로’, ‘통하며’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단어의 전체적 의미는 가장 근원적인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속 깊이 명확하게 모든 부분의 특성을 띤 요소요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사물의 기본적 현실을 볼 수 있는 지혜로 이끈다. 이 모든 것들이 통틀어 Vipassana Bhavana 는 지혜와 깊은 이해력으로 꿰뚫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 마음 계발이다.
위빠사나에선 인생을 이 특별한 방법으로 관찰하는 것을 계발한다. 사실을 정확하게 사실대로 보는 것을 훈련하며, 이 특별한 인식과정을 ‘깨어있음’이라 부른다. 이 깨어 있은 과정은 우리가 통상하는 과정과는 매우 다르다. 우린 통상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우린 삶을 생각과 관습이란 스크린을 통해서 보며 그런 정신적 물질을 우리의 현실이라 착각한다. 우린 끝없는 생각의 흐름에 묶여 살고 있고, 사실의 흐름은 인식되지 않은 채 흘러간다. 끝없이 고통과 불쾌함으로부터 도망가며, 즐거움과 만족스러움을 끝없이 추구하는데 푹 빠져 산다. 우리의 두려움을 묻어 버리려 하며, 조금이라도 기분 좋도록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한다. 우린 끝없이 편안함을 추구한다. 그러는 동안, 현실은 경험되지 않고, 맛보여지지 않고 흘러 지나간다. 위빠사나 명상에선 더욱더 안락하려는 충동을 무시하고 사실 속으로 뛰어드는 훈련을 한다. 모순적인 것은 진정한 평화는 오직 이것을 추구하지 않을 때 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궁지 이다.
편안함을 원하는 지배적인 욕구를 이완시킬 때 진정한 만족이 일어난다. 급성으로 일어나는 만족감의 추구를 놓아버리면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현실을 망상 없이 모든 고통과 위험을 포함해 알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자유와 안전이 당신의 것이 된다. 어떤 교리를 당신에게 집어넣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관찰할 수 있는 현실이고, 당신 스스로가 경험하고 직시해야 할 것이다.
불교는 2500년 된 것이다. 그렇게 오래된 생각 방법들은 그 오랜 세월을 거쳐 많은 층의 교리나 의식(ritual)들을 개발해왔다. 하지만 불교의 기본적 마음자세는 진실로 경험적이며, 불 고전적(anti-traditionalist)이다. 고타마 부다는 매우 획기적이며 불 고전적 이였었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고정된 정설이 아닌, 본인이 스스로가 검토해야 할 제안(proposition)으로 제공했다. 그가 모두에게 한 제안은 “와서 보아라.” 그가 그의 수행자들에게 말하길, “누구의 머리도 당신 것 위에 놓지 마라.” 즉, 누구의 말도 받아들이지 마라. 당신 스스로 확인 해라.
우리는 당신이 이 책에 있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를 이런 자세로 검토하길 바란다. 우리가 이 분야의 권위자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기복적인 것과 전혀 관계없다. 우린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 이 책에 주어진 방법들로 당신의 인식과정을 조절시키는 것을 배우면 당신은 확인할 수 있다. 오직 이것만이 당신의 믿음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지혜명상은 개인을 연구하며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짧게 불교 철학의 개요를 정리 해보겠다. 다른 많고 좋은 책들이 이것을 완벽히 정리 했으니 우리는 위빠사나를 이해하기위해 기본적으로만 설명하겠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들은 매우 이상한 방법으로 산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보고, 모든 것이 바뀌고 있는데도 비영구적인 것들을 영구적 이라고 생각한다. 변화는 영원하고 계속된다. 이글을 읽는 동안 당신의 몸은 늙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거기엔 아무 신경을 안 쓴다. 당신 손에든 책도 부식해가고 있다. 프린트도 흐려지고 있고 종이도 부서져 가고 있다. 당신 주변의 벽들도 늙어가고 있다. 그 벽을 이루고 있는 분자들은 무서운 속도로 진동하고 있고, 모든 것이 움직거리고 있고, 부서지고 있고,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다. 우린 그런 것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하루 주변을 돌아본다. 몸은 주름져있고 끼긱 거리고 아프다. 이 책도 누레져있고, 쓸데없는 덩이로 변해있고, 건물도 허물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잃어버린 젊음을 갈망하고 재물이 없어지면 울고 만다. 이런 고통들은 어디서 올까? 당신의 부 주의로부터 오는 것이다.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지속적 흐름과 변화를 관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책’, ‘건물’이란 관념들을 만들고는 그것들이 확실히 현존하는 존재라고 가정해버렸다.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변화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을 춤이나 심포니처럼 아주 아름다운 영원한 흐름으로 인지 하도록 배울 수 있다. 모든 지속되는 흘러 없어짐을 즐길 수 있게 된다. 흐름의 역방향으로 뛰어 가기는커녕 흘러가는 현실과 동행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배울 수 있다. 시간과 연습에 달렸다.
우리 인간의 습관은 참으로도 여러모로 바보스럽다. 현실적으로 닥쳐오는 자극중의 99%는 다 버리고 나머지를 추상적인 정신적 물질을 고체화 해 버린다. 그래놓고 정신적 물질들에게 관습적으로 반응한다. 예를 들자: 고요한 밤중에 당신은 혼자 앉아있다. 멀리서 개가 짖는다. 이 현실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표현하기 어려울정도로 아름다운 것이다. 침묵의 바다로부터 음적 파동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미묘하고 복잡한 작은 패턴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그것들은 당신의 신경계 속에서 생기발랄한 전기 자극들로 바뀐다. 이 과정자체도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것이다. 우리 이간들은 이것을 대체적으로 완전히 무시 해버린다. 대신 우린 그 과정을 하나의 정신물질로 인식해버린다. 그것에다 정신적 관념을 입히고 심적이나 개념적 반응을 일괄적으로 일으킨다. “아, 또 개가 짖는군. 저놈은 한상 밤에만 짖어. 망할 놈, 매일 밤마다 방해하네. 누가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경찰을 부를까? 아, 개 유치소에 전화해야겠다. 아니, 주인에게 무지 기분 나쁜 편지를 쓸까? 에그~, 귀찮다. 귀마개나 사야지.” 이것들은 심적 물질적 습관일 뿐이다. 이런 인식 과정은 신경계의 시스템 작동에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회로는 있지만 오직 이렇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워진 것을 지워 버릴 수도 있다. 첫 단계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불교 입장에서 말하자면, 우리 인간들은 인생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 고통의 원인을 보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한다. 고통의 원인은 앞에서 말한 욕망 피하기 증후군이다. 인식이 생긴다. 무엇이든 좋다 - 아름다운 여자, 근사한 남자, 스피드 보트, 총들은 불량배, 달려오는 트럭, 무엇이든 좋다. 뭣이 됐건, 바로 다음 행하는 것은 그 자극에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이다.
걱정에 대해 말해보자. 우린 걱정을 많이 한다. 걱정 그 자체가 문제다. 걱정은 과정이다. 단계가 있다. 금심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면, 그 과정의 첫 단계부터 보아야 한다. 여러 단계가 지나 스스로 가동력이 생기기 전의 첫 단계들부터 봐야 된다. 걱정이란 단계의 첫 고리는 갈애와 버림이란 반응이다. 어떤 현상이 마음에 들어온 순간 우린 그것을 정신적으로 가지려 하던지 버리려고 한다. 이것이 걱정이란 현상을 가동시킨다. 다행히도 이런 메커니즘을 끊어 버릴 수 있는 위빠사나라는 도구가 있다.
명상은 굉장한 정확도를 가지고 우리의 인식과정을 꼼꼼히 조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생각과 인식의 생겨남을 침착한 초연함(detachment)을 가지고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자극들에게 일어나는 자신의 반응을 고요하고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런 반응들에 휩쓸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생각의 강박적인 성격은 천천히 죽어간다.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 달려오는 트럭을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생각으로부터 오는 지옥 같은 상황을 격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강박적 성격을 지니는 생각과 과정에서 해어 나오면 현실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대상파악 방법에 근본적 변화가 오는 것이다. 평화로움, 정의로움, 삶에 대한 새로운 활력, 그리고 모든 행동에 대한 완벽한 느낌이 생긴다. 이러한 이로움을 때문에 불교는 이런 인식과절을 바fms 견해라고 생각하고 있고 불교 문서들은 이것을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위빠사나는 서서히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현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게 훈련하는 과정이다. 이 새로운 현실과 함께 가장 핵심적인 현실 ‘나’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긴다. 면밀히 조사해보면 우리가 ‘나’라는 것에 모든 다른 것에 적용했던 인식과정을 사용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흐르며 변하고 있는 생각, 감정과 느낌의 소용돌이를 어떤 정신적 개념으로 고체화 시킨다. 이러고선 우린 그것을 어떤 영원히 고정 불멸하는 존재처럼 다룬다. 그것을 모든 것과는 분리된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우주의 영원한 변화라는 법칙에서 우리 자신만을 띠어낸다. 그래놓고는 우리가 외롭다고 슬퍼한다. 선천적으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있음을 무시하고 ‘나를 위해서 뭔가 더 필요해.’라고 결정한다. 그래놓고는 인간들이 얼마나 욕심쟁이이며 무감각하냐며 감탄한다. 상황은 돌고 돈다. 모든 나쁜 짓, 세상의 모든 사랑이 결핍된 짓들이 이러 ‘나’라는 한 특별한 것이란 그릇된 느낌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개념의 환상을 깨버리면 당신의 우주는 바뀌고 만다. 이것은 하룻밤사이에 해낼 생각은 말아라. 인생 내내 그런 잘못된 개념을 쌓았으며 그것을 강화 시켜왔다. 그런 것이 순간적으로 증발해 버리진 않는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과 주의력을 주면 없어질 것이다. 위빠사나는 이것이 녹아내리는 과정이다. 이것을 지켜보며, 서서히 조금씩 쪼아내는 과정이다.
‘나’라는 개념 역시 과정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과정이다. 위빠사나에선 우리가 이 과정을 ‘진행 중 이구나’ 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구름이 맑은 하늘에서 없어지듯 서서히 흐려 없어진다. 우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괘도에 들어서게 된다. 필수적이란 요소가 없어지고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이것은 대단한 지혜다.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이며 깊은 이해이다. 이런 것은 갑자기 생기지도 않으며,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성과는 크다. 삶에 완전한 변화가 오는 것이다. 그 순간 이후부터 인생이 바뀌는 것이다. 명상 자가 이 길을 끝까지 가고 나면 완벽한 정신적 행복,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순결한 사랑, 그리고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건 대단한 목표이다. 하지만 끝까지 가지 않더라도 많은 이익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이익들은 금방 일어나기 시작하며 해가 가며 쌓이고 쌓인다. 축적적인 효과가 있다. 좌선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존재의 본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수행하면 할수록 매순간 일어나는 본인의 생각과 감정, 충동과 결의들을 고요히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 자유로워지는 발전의 정도는 방석에 앉아있는 시간과 비래한다. 충분하다고 생각 되면 그만 하면 된다. 인생의 본성을 보고자 하는 의욕, 본인과 타인의 삶을 향상시키고자하는 의욕은 있지만, 매는 없다.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것은 아니다. 명상을 실습하는 중 삶과 본인의 감정 그 자체에 대해 민감해 진다. 삶에 대한 미묘하거나 미학적인 이론들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겪는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무엇보다도 삶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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