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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12-2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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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해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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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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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해설 1
교재 :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념처(四念處) 이다.
대념처경 주석서에 나와 있는 예화가 있다. 어떤 광대가 앵무새 새끼를 길들여 돌아다니다가 한 비구니 처소에서 풀어주었다. 이 앵무새를 그 절의 사미니들이 다시 데려와 키우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절의 대 장로 비구니는 앵무새에게 수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복잡한 것은 할 수 없기에 그냥 ‘뼈, 뼈’하면서 오로지 마음으로 뼈만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어느 날 끽끽 소리가 나서 보니 큰 새가 와서 그 앵무새를 발톱으로 낚아채 가려 하였다. 사미니들이 막대기를 들고 쫒아가 앵무새를 다시 구해왔다. 이 때 대 장로 비구니가 앵무새에게 잡혀갈 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하니까 앵무새는 오직 뼈 무더기가 뼈 무더기를 가지고 갈 뿐이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 pp 79)
이 짤막한 우화는 사념처 수행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되는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념처 수행은 대상을 올바로 관찰하고 그 특성을 이해하여 올바른 견해를 확립하는 것이다. 몸, 느낌, 마음, 생각 등의 네 가지 범주를 관찰할 때 어떤 방식으로 대상을 보는지 한 예를 든 것이다.
사념처는 여러 관점으로 나와 다른 존재들을 보는 것이다. 가령 뼈라는 관점으로 줄기차게 나를 볼 수 있고, 몸이라는 관점으로 혹은 느낌의 관점에서, 정신 작용의 관점에서 그리고 물질의 관점에서 나를 볼 수 있다. 또 다르게는 사대(지,수, 화, 풍)의 관점에서 볼 수 있고 오온(색, 수, 상, 행, 식)의 관점으로 나를 볼 수 있고 감각 기관(12처)의 관점에서 나를 보게 한다.
어느 관점에서 보던지 최종적으로는 그 존재하는 특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 순간의 상황에 따라, 혹은 개인적인 기질에 따라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으로 나의 존재하는 모습을 파악해 보는 것이다.
이때 대상을 볼 때 특별히 신경써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절대로 추상적인 개념으로 나를 보아서는 안된다. 가령 몸을 관찰할 때 느낌이나 마음이 아닌 몸만을 관찰하며 이 때도 전체적으로 몸이라는 생각보다는 여러 요소들이 복합 작용하고 있는 어떤 상태로 보아야 한다. 남자다 여자다, 한국 사람이다, 외국 사람이다, 혹은 노인이다, 아기이다 라는 개념이 아닌 요소의 구성물로서 몸을 대한다.
주석서에서는 마차의 구성요소를 관찰하듯 팔, 다리, 머리털, 오장 육부 등의 여러 요소들이 결합된 덩어리로 보라고 한다. 이렇게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집합체라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무상하다고 알며 항상하다고 알지 않는다. 괴로움이라고 알고 행복이라고 알지 않는다. 무아라고 알며 자아가 있다고 알지 않는다. 싫어하게 되고 즐거워 하지 않는다. 집착을 버리며 집착에 물들지 않는다. 없어지게 노력하지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완전히 놓아버리게 하며 움켜지지 않는다. (pp108)
두 번째 반드시 신경써야 할 것은 대상을 관찰할 때 단순히 관찰하고 알기만 해야 한다. 평상시 우리는 어떤 대상을 알 때 알자마자 반응이 따라 붙는다.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거나 좋으면 더 바라고 싫으면 피하고 싶어 한다.
그냥 어떤 의도도 개입하지 않고 비디오카메라가 그냥 대상을 촬영만 하는 것처럼 대상에 따라가지 않고 알기만 하여야 한다. 더 잘해야 겠다는 의도도 대상을 관찰하는데 방해가 된다. 완전히 이완되고 정신적인 신체적인 힘을 빼고 알기만 할 때 아주 강력하게 대상에 밀착된다.
칼라카라마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신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눈에 보여지는 것을 떠나 있는 ‘보이는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또 그는 ‘보여지지 않은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그는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그는 보는 사람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그는 감각을 떠나서 ‘감지되어지는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또 그는 ‘감지되지 않은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그는 ‘감지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그는 감지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그는 인식을 떠나 ‘인지되는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또 그는 ‘인지되지 않은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그는 ‘인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그는 인지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보여지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나, 느껴지는 것이나 그리고 인지되어 지는 것이나 모든 현상을 단지 ‘이와 같이’ 알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한다.
보여지는, 들리는, 감촉되는, 또는 갈망되어지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진리로 존중한다. 그들 자신의 견해에 둘러싸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아는’ 존재인 나는 거짓도 진실도 잡지 않으니. 미리 앞서서, 내가 보았던 장애가 되는 이 ‘가시’ 거기 인류가 걸려 넘어지고 찔리는 곳. 나는 안다. 나는 보았다. 이것은 정말로 그러하니. 이러한 집착이 없는 여래니.“
우다나경의 말씀에
“바히야, 그대는 그대 자신을 이렇게 수행하여야만 한다. 볼 때는 거기 오직 봄만이 있어야 한다. 들을 때는 거기 오직 들음만이 있어야 한다. 감촉되어질 때는 거기 오직 감촉만이 있어야 한다. 인지할 때는 거기 오직 인지함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히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수행해야 하는 방법이다.
자, 바히야,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느낄 때는 느끼기만 하고 알 때는 알기만 할 때 그러면 비히야, 그대는 그것들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바히야, 그대는 그것들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바히야, 그대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 중간’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 자체가 고통의 끝이니라”
세 번째 중요한 것은 대상을 알기만 하지만 온전히 대상에만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의도함 없이 대상을 알기만 할 때 자연스럽게 대상이 나의 의식을 잡아 당겨 대상이 더욱 뚜렷하게 알아지는데 이렇게 노력을 많이 하여 대상과 밀착 상태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의도함 없이 보지만 정확히 빠르게 생겨나 사라지는 대상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대목이다.
한때 부처님이 아투마의 왕겨 곳간에 거주하고 있을 때였다. 부처님이 왕겨 곳간에서 나와 그 문가에서 천천히 왔다 갔다 하며 걷고 있었다. 그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고 그 와중에 벼락을 맞아 농부 두명과 황소 네 마리가 죽었다. 때문에 이일로 사람들이 그 왕겨 곳간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모여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이 물었다.
“이보시게, 왜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나?”
“붓다여, 바로 전에 벼락이 떨어져서 농부 두명과 황소 네 마리가 즉사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곳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어디 계셨습니까?”
“나는 바로 여기 있었네”
“어째서 붓다께서는 지금 벌어진 일을 보지 못했습니까?”“나는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했다네”
“붓다여, 그 때 주무셨습니까?”
“아니오. 나는 자고 있지 않았다오”
“그럼 그 순간을 잘 알고 계신건가요”“그렀다네. 친구여”
“그렇다면 붓다여. 당신은 의식하고 계셨고 깨어 있으면서 그 어떤 것도 보거나 듣지 못했단 말입니까?”“그렇다네. 친구여”
또 다른 경의 내용이다.
“되어지고 있는 것의 사라짐이 열반이다. 되어지고 있는 것의 소멸이 열반이다. 이와 같이, 친구여, 내 안에 하나의 인지가 일어나고, 다른 하나의 인지는 내 안에서 사라져 간다. 친구여, 마치,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을 때, 하나의 불꽃이 타오르며, 다른 하나의 불꽃은 사라져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친구여, 내 안에 하나의 인지가 일어난다. ‘되어짐의 사라짐이 열반이다’라고 하는 . 그리고 다른 인지가 내 안에서 사라져 간다. ‘되어짐의 사라짐이 열반이다’라고 하는.
친구여. 그 때에 나는 이것에 대해 의식할 뿐이다. ‘되어짐의 사라짐이 열반이다’라는 것을.
-증일아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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