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에게,

편지 잘 받아 보았다. 너와 가족 모두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지난 번에 내가 내주었던 공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이로 가지를 악물고 나무에 매달려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그 공안 말이다. 너의 대답은 그저 생각일 뿐이다. 너의 두발은 묶여 있으니 어떻게 그 사람을 걷어찰 수 있을까?
이 공안을 푸는데 오로지 필요한 것은 절대 긍정의 행동이란다.
그 행동은 이미 삶과 죽읆을 초월한 것이다. 네가 살아야 한다는 데 집착한다면 그 공안을 풀 수 없다.

딸에 관해서 이야기했었지?
딸아이에게 "이제는 스스로 결정해야만 해"라고 말할 거라고? 너무 어려운 문제다. 때로는 백 년을 산 노인도 어느 것이 옳은지 선택하지 못한다. 하물며 열세 살 싸리 아이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선택할 수 있을까?

딸아이에게 선에 관해 이야기해주고 싶다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엄마는 참선을 좋아해. 다른 종교도 좋지만 엄마가 교감할 수 있는 것은 참선뿐이거든. 그래서 좌선을 하는 거란다. 한 번만 선원에 가서 명상해보지 않을래? 한 번 가보자. 싫으면 엄마도 강요하진 않을게."

열두 살에서 열 일곱 살 사이에 있는 아이들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이 있다. 알고 싶은 것도 많고 감성도 강하며 지적인 능력도 강한 시기이지만 그에 비해 의지가 강하지는 않거든. 그래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딸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정확하게 해주어야 한다. 참선이 중요한 이유를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렴.

그리고 사람됨이란 무엇이고 지금은 어떤 세상이며 인연(因緣)이란 무엇이고, 옳고 그른게 무엇인지 이야기 해줄 필요가 있다. 그 아이는 어떤 것도 수용하고 배울 수 잇는 매우 중요한 성장기에 있으니까 위에서 말한 것들을 꼭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번에 옳은 방향을 가르친다면 이기적인 길을 택하지 않도록 그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엄마가 해줄 수 잇는 일이 그런게 아닐까? 무조건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해주는 것은 충분한 교육이 아니다.
너의 생각에만 집착한다면 매일매일의 삶이 꿈일 것이며, 딸에게 옳은 길을 가르쳐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에서 깨어난다면 모녀사이에 강한 혈육의 정으로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매우 돈독한 인연을 가졌던 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일어난, 견성(見性)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마. 5백년전 한국에 아주 부유하고, 유명한 학승이 계셨다.
그 당시에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스님들은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제자들이 강원(講院)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었다. 따라서 돈이 많은 스님에게는 제자가 많았으나, 가난한 스님에게는 제자가 거의 없을 수밖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님에게는 백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중 마지막 제자가 "돌음"이었다. 돌음은 스님께 학비를 받아 3년 동안 경전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어느 날"이런 경전은 아무 필요가 없어. 경정이란 우리의 마음을 구하기 위한 것뿐이니 이미 내 마음이 비어 있다면 경전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 그래서 참선 도량으로 들어가 수행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스승에게 말했다. "스님, 오로지 경전만을 읽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이제는 선방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스님은 연로하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그 때 스님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네 말이 맞다. 우리 함께 가자꾸나. 그런데 내 땅과 곡식창고, 그리고 재산은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스님께는 유능한 제자들이 있으니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시지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럼 결정되었다. 내일 바로 떠나자꾸나."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난 부자가 되고 싶어. 유명한 스승이 되고 싶어"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돌음이라는 제자만 공부를 제대로 했던 셈이지. 그의 스승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 내가 백 번째 제자까지만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더니 부처님께서 이토록 영특한 제자를 보내주셨구나. 돌음의 뜻을 따르니 좋지 않은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은 가운데 스승은 돌음과 함께 선방으로 들어갈 것임을 알리는 모임을 열었다. 그 스승은 자신의 논과 커다란 곡신 창고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고는 제자들에게 각각 할 일을 정해 주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에 두 사람은 짐을 꾸려 작별 인사를 한 뒤 선방으로 향했다. 산으로 올라가던 그들이 잠시 쉬어 차를 마시기 위해 멈춰 섰을 때였다. 계곡 상이에 있는 절을 내려다보던 돌음이 절에 불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는 "스님, 절에 불이 났어요!"하고 외쳤다. "이런! 내 창고에 불이 났구나. 너 혼자서 가라. 나는 절로 돌아가야겠어!" "하지만, 스님, 스님은 곧 돌아가실텐데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난 절로 돌아가야 해!"

마침내 그 스승은 자신의 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돌음은 재산에 집착하는 스승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선방을 향해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 그 노승이 입적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스님의 49재가 다가왔다. 수많은 조문객과 제자들이 모여들어 먹고 마시며 스승의 재산을 나누어 갖기 위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 때 돌음도 49재에 참석하였는데 그 곳에서 맏 사형(師兄)을 만났다. "스님께서 입적하실 땐 꼼짝도 않더니 이제야 왔어? 그러고도 재산을 나누어 갖겠다구?"
"아닙니다. 제게는 땅이나 돈은 필요 없어요. 주실 수 있다면 그저 죽 두 그릇만 주세요. 부탁입니다."
"고작 구게 다냐?" "네"
"좋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에는 마을의 혼령들에게 음식물을 바쳐 의식을 치르는 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돌음은 큰 맷돌이 있는 넓은 들에 죽을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는 법당으로 들어가 가장 안쪽의 기둥을 세번 치자 큰 뱀이 나타나 그 맷돌 쪽으로 기어가 돌음이 가져다 둔 죽을 모두 마셨다.

돌음이 그 뱀에게 물었다. "스님, 어떻게 뱀의 몸을 빌리셨습니까?"
"미안하다. 진작 네 말을 듣지 않아 뱀의 몸을 빌리게 되었구나."
그 스승은 왜 뱀으로 태어났을까? 그토록 상대한 49재를 치렀는데도 고작 뱀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의 마음이 뱀과 같았기 때문이지. 뱀은 눈물을 흘렸다. 돌음은 이렇게 말했다. "스님께서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뱀으로 환생하여 그 죽을 다 드셨는데도 족하지 않으십니까? 어서 맷돌에 머리를 찧으셔서 그 몸을 버리십시오!"

"이 몸이 어때서 그러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하셔야만 합니다!" 뱀이 된 스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정 그리 못 하시겠습니까?" 이윽고 돌음은 그 뱀을 세 번 쳐서 죽였다.
그러자 뱀의 시체에서 시퍼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 허공으로 올라갔다.
돌음은 그 연기를 따라갔다. 연기는 생의 형상을 빌리기 위해 근처를 날던 새를 쫓아갔다. "안 돼요!" 돌음이 소리쳤다. 그 연기는 다시 황소의 몸 속에 깃들려고 하였다. "안 돼요!"돌음은 다시 소리쳤다. 그러자 연기는 더 멀리 날아 깊은 산속 두 중년 부부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 돌음은 그 숲 속 오두막집으로 찾아가 세 살 박이 아들이 잘 있느냐고 물었다. 중년 부부는 놀랐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아들의 건은 몹시 나빠다. 하지만 돌음이 그 아기를 안아주자 순식간에 건강을 되찾았고, 행복해했다. 돌음이 그들 부부에게 당부를 했다. "이 아이를 제게 맡겨 주십시오. 만일 제 청을 거절한다면 이 아이는 다시 건강이 나빠져서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부부는 망설였으나 아들이 죽는다는 소리에 그 청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돌음과 아들 사이에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돌음이 말했다. "이제는 네 자신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알겠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하죠?"

돌음은 그 아이를 바늘구멍이 난 창호지 문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커다란 황소가 그 구멍으로 빠져 나올 때까지 그 구멍을 보고 있어라.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황소만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그 황소가 이 구멍으로 들어올 때 네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동자(童子)는 그 산속의 잔은 암자에서 먹고 잠자며 창호지의 구멍만 쳐다보았다. "황소는 언제 나타날까?" 총명한 그 아이의 마음에는 이런 의문뿐이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 거의 백일이 되었을 때 그 구멍이 점점 커지고, 마침내 커다란 황소가 나타나서 "음메!"하고 우는 게 아닌가?
"스님! 스님! 황소가 나타났어요!"

돌음이 황급히 뛰어와서는 그 동자의 뺨을 때렸다. "소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앗! 동자는 그 순간 자신의 전생을 완전히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동자는 그의 옛 제자를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너는 이전에 내 제자가 아니었더냐?"
"예, 맞습니다." 돌음은 이내 돌아온 스승에게 절을 했다.

그러니, 이제 깨어나렴! 그 동자도 일찍 깨어나지 않았느냐?
전생에는 욕심이 너무 많았으므로 돌음을 만나기 전에는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지. 그런데 돌음은 돌아가신 스승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동자를 아끼고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스승은 아름답게 환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돌음은 인내를 가지고 동자가 마음을 열도록 도아주었던 것이지.

돌음과 그 스승은 인연이 깊어 다음 생애에서도 다시 사제지간이 되었던 것이다. 모녀지간도 마찬가지로 내생까지 깊은 인연을 가지게 된단다. 재미있는 일이지. 똑같은 인연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강한 의지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돌음의 경우에도 입산하기 전까지는 스승과의 인연을 깊게 맺을 수 없었지만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자아는 물론 스승의 마음도 꿰뚫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너도 우선 네가 나아갈 길을 찾아 네 업을 이해하고 딸아이와 가족, 친구 그리고 네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과의 인연을 깊이 가꾸렴. 그럼으로써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을 것이야. 네가 "오직 모를 뿐"이란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 미망에서 깨어나고, 딸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며, 번뇌에 빠진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숭산 합장